“나는 콘스탄티노플과 내 쓸모없는 일을 증오했다.”
이 말은 오데사 출신의 시오니스트 유대인 블라디미르 제브 자보틴스키가 약 25년 후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한 이스탄불에서의 시간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1908년 청년 튀르크 혁명에 처음에는 큰 기대를 품었으나, 이스탄불에서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낙관은 곧 좌절로 바뀌었다.
자보틴스키는 수정주의 시오니즘의 창시자로, 이는 초국가주의적이고 확장주의적인 시오니즘의 한 형태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08년부터 1910년까지 다문화 도시였던 이스탄불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처음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저널 '라스비에트(The Dawn)'의 관찰자로 이스탄불에 도착했으며, 곧 청년 튀르크파를 지지하는 신문 '르 쥬느 튀르크(Le Jeune Turc)'에 기고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스탄불에 도착하기 전부터 자보틴스키는 유럽 시오니스트들 사이에서 러시아에서의 강력한 활동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혁명 이후, 세계 시오니스트 기구(WZO)의 일원으로서 그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할 수 있도록 오스만 제국의 지배층을 설득하려 했으며, 이를 오스만 애국주의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자보틴스키와 WZO 모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이 분리주의적 함의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부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층은 이를 제국의 영토적 통합성을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했다.
한 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 팔레스타인에서의 이러한 실패한 시도는 튀르키예 영토에서의 시오니스트 야망이 오래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남아 있다.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최근 이러한 맥락에서 시오니스트들의 '약속된 땅'이라는 망상이 언젠가 이스라엘의 야망을 튀르키예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스탄불: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관문
자보틴스키 이전에, 테오도르 헤르츨이 오스만 제국을 설득하여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을 허용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당시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단호한 태도로 인해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1908년 혁명 이후, WZO 관계자들은 제국 내에서 시오니스트 노력을 재활성화할 기회로 이를 보았다.
자보틴스키는 이러한 새로운 노력의 이상적인 후보자로 여겨졌으며, 그는 이미 러시아 신문에 오스만 제국에 대한 관찰을 공유하는 일련의 기사를 발표한 바 있었다. 이 글에서 그는 집권한 통일진보위원회(CUP)를 지지하고 세파르디 유대인과 튀르키예인 간의 강력한 관계를 구축할 것을 주장했다.
자보틴스키는 오스만 튀르키예인들이 시오니스트 운동에 대해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유대인 분리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기회로 보았다. 그는 아랍 지역에 유대인 인구가 존재하면 아랍 인구를 약화시켜 아랍의 지배력을 희석시키는 데 튀르키예 지도부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자보틴스키가 이스탄불에 도착했을 때, 빅터 야콥슨 박사와 같은 다른 시오니스트 지도자들이 이미 외교적 노력을 위한 기초를 다지고 있었다. 야콥슨은 앵글로-팔레스타인 회사의 이스탄불 지부장이자 앵글로-레반틴 은행 회사로 현지 등록된 조직의 책임자로서, 이스탄불에 첫 시오니스트 사무소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 사무소는 살로니카와 이즈미르와 같은 유대인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시오니즘에 대한 정부와 대중의 지지를 얻는 것을 목표로 했다.
시오니스트 선전
1909년 8월 WZO 회의에서 오스만 제국 내 시오니스트 언론 활동을 감독할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같은 해 8월 4일, '르 쥬느 튀르크' 신문이 설립되었으며, 이는 WZO의 두 번째 회장인 데이비드 울프손과 빅터 야콥슨 박사와 같은 시오니스트 관계자들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이 신문의 주요 기고자에는 자보틴스키, 편집장 젤랄 누리 일레리, 그리고 아흐메트 아가오글루와 모이즈 코헨(후에 무니스 테킨 알프라는 이름으로 알려짐)과 같은 저명한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르 쥬느 튀르크'는 단순한 언론 매체를 넘어 튀르키예와 유대인 지식인들이 만나는 장소로 기능했으며, 자보틴스키는 시오니스트 선전을 홍보하는 연설을 활발히 진행했다.
초기에는 이 신문이 성공적이었다. 일부 오스만 지식인들은 시오니즘을 주변적 운동이자 유럽 질서에 대한 반동적 힘으로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대리인으로 간주된 '알리앙스 이스라엘리트 유니버셀'과의 갈등에서 시오니스트들을 지지했다. 당시 시오니즘은 명시적으로 유럽 제국주의 정체성을 홍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만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는 상황이 더 복잡했다. 나임 하훔 수석 랍비는 시오니스트들이 1909년 수석 랍비 선거에서 그의 경쟁자인 랍비 야코브를 지지했기 때문에 시오니스트들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마누엘 카라소, 니심 마즐리아, 니심 루소와 같은 몇몇 오스만 의회 의원들은 더 동정적이었다.
이 의원들은 시오니즘이 분리주의적 야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오스만 애국주의와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무니스 테킨 알프는 1909년 12월 함부르크에서 열린 시오니스트 회의에서 연설하며 시오니즘과 오스만 가치의 조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자보틴스키는 제국 내 시오니스트 목표의 더딘 진전에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점진적 접근이 진정한 목표인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정착을 흐리게 한다고 믿었다.
행동주의가 점진적 접근을 능가하다
청년 튀르크파에 대한 실망을 회고하며, 자보틴스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청년 튀르크당의 총서기 나짐 베이와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어떤 압력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들에게는 전체적인 동화가 그들의 국가라는 헛소리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리고 시오니즘에게는 그 헛소리의 파괴 외에는 희망이 없다.'
그의 WZO와의 의견 차이, 청년 튀르크파에 대한 불신, 그리고 '동양'에 대한 경멸은 그가 1910년에 사임하고 해고되는 결과를 낳았다. 자보틴스키의 행동주의적 성향은 그를 더 급진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게 했으며, 여기에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영국군에 합류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1914년 말, 이집트에서 전쟁 특파원으로 일하던 자보틴스키는 유대인 군단을 조직하기 위한 자원봉사자 모집을 시작했다. 이는 WZO와는 별개의 독립적인 활동이었다. 그는 요세프 트럼펠도르, 피나스 루텐베르크, 메이어 그로스만과 함께 유대인 군사 부대를 조직하여 영국을 지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의 직접적인 전투 대신, 영국은 그들을 차나칼레 전쟁의 후방 부대인 시온 노새 군단에 배치했다. 이 경험은 자보틴스키의 영국에 대한 후일의 반감을 키웠으며, 이는 결국 이르군 테러 조직의 형성에 기여했다.
1925년, 자보틴스키는 파리에서 세계 수정주의 시오니스트 연합을 설립하여 시오니스트 정책을 수정하려 했으나, 그 핵심 목표는 유지했다. 이와 함께 그는 리가에 본부를 둔 청소년 운동 베타르(Brit Trumpeldor)를 설립했다.
이스탄불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보틴스키는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자신의 시오니스트 선전이 결국 결실을 맺는 것을 목격했다. 1933년, 이스라엘 건국 15년 전, 자보틴스키가 설립한 베타르 운동의 이스탄불 지부가 튀르키예에서 새로운 세대의 젊은 유대인들에 의해 개설되었다. 이들은 한때 시오니즘과 거리를 두었던 사람들의 후손이었다.